블로그 목록

[역사 속 오늘] 설거지하다 탄생한 판유리, 마천루의 피부가 되다

도심 한복판을 걷다 보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거대한 빌딩 숲을 마주하게 됩니다. 거울처럼 매끄럽게 반짝이며 푸른 하늘과 구름을 그대로 반사하는 통유리 빌딩들. 혹시 이 거대한 건물들의 외벽을 덮고 있는 수천 장의 유리창을 보며 이런 궁금증을 가져본 적 없으신가요? '저렇게 크고 완벽하게 평평한 유리를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양으로 만들어내는 걸까?'


우리는 앞선 에피소드들을 통해 현대 마천루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퍼즐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왔습니다. 엘리샤 오티스의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을 펜트하우스로 만들며 수직 이동의 한계를 깼고(223편), 조제프 모니에의 철근 콘크리트가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하늘로 솟을 수 있는 튼튼한 뼈대를 제공했습니다(224편). 그리고 윌리스 캐리어의 에어컨이 밀폐된 고층 건물의 찜통더위를 해결하며 쾌적한 실내 환경을 완성했죠(225편).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갖춰졌다고 해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세련된 현대식 빌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뼈대만 있는 건물에 아름답고 매끄러운 '피부'를 입혀야만 비로소 마천루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현대 건축의 화룡점정이자,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반짝이게 만든 혁명적인 발명, '플로트 유리(Float Glass)'와 판유리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창문 너머 세상이 일그러져 보이던 시대

유리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건축용 '창문'으로 유리가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크고 평평하며 투명한 유리를 만드는 것은 인류에게 엄청난 기술적 난제이자 막대한 비용이 드는 작업이었습니다.


과거 유럽의 오래된 성이나 성당을 방문해 보신 적이 있다면, 창문 유리가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 있고, 표면이 울퉁불퉁해 바깥 풍경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당시에는 유리를 평평하게 만드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크라운 유리(Crown Glass): 긴 파이프 끝에 유리를 묻혀 입으로 분 뒤, 빠르게 회전시켜 원반 모양으로 펴는 방식입니다. 원심력을 이용하다 보니 가운데는 두껍고(황소의 눈이라 불림) 가장자리로 갈수록 얇아졌습니다. 당연히 크기에 한계가 있었고, 평활도(평평한 정도)도 떨어졌습니다.
  • 실린더 유리(Cylinder Glass): 유리를 길쭉한 원통형으로 분 다음, 반으로 갈라 열을 가해 펴는 방식입니다. 크라운 유리보다는 크게 만들 수 있었지만, 여전히 표면이 고르지 못해 풍경이 왜곡되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유층이나 궁전에서 쓰던 대형 거울이나 쇼윈도는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연마 판유리(Polished Plate Glass)'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쇳물처럼 녹은 유리를 롤러로 밀어 판판하게 만든 뒤, 수많은 인부들이 기계와 연마제를 이용해 유리 양면을 깎고 갈아서 광을 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전체 생산 공정의 20%가 유리를 깎아내는 데 버려질 정도로 비효율적이었고, 인건비와 시간이 막대하게 투입되어 '보석'에 버금갈 정도로 비쌌습니다.


설거지통에서 건져 올린 세기의 발명, 플로트 유리

1952년 영국의 어느 저녁, 유리 제조 기업 '필킹턴 브라더스(Pilkington Brothers)'의 엔지니어였던 알라스테어 필킹턴(Alastair Pilkington)은 아내를 도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유리를 깎아내는 연마 과정 없이 완벽하게 평평한 유리를 대량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뿐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습니다. 설거지통의 따뜻한 물 위에 떠 있는 기름띠가 완벽하게 평평한 층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액체 위에 다른 액체를 띄우면, 중력과 표면장력에 의해 두 액체의 경계면은 완벽한 수평을 이룬다! 그렇다면 녹은 유리물을 그보다 무거운 뜨거운 액체 위에 띄우면 어떨까?"


이것이 바로 현대 유리 산업을 완전히 뒤바꾼 '플로트 공법(Float Glass Process)'의 위대한 시작이었습니다. 필킹턴은 유리를 띄울 완벽한 액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조건은 까다로웠습니다. 유리가 녹는 온도(약 1,500℃)에서 끓거나 기화되지 않아야 하고, 유리보다 밀도가 높아 유리가 가라앉지 않아야 하며, 유리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아야 했습니다.


수많은 실험 끝에 그가 찾아낸 완벽한 물질은 바로 '주석(Tin)'이었습니다. 주석은 232℃에서 녹지만 2,270℃가 되어야 끓기 때문에, 뜨거운 용광로 안에서도 액체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했습니다.


플로트 유리의 마법 같은 제조 과정

  1. 거대한 용광로에서 모래, 석회석, 소다회 등을 1,500℃의 고온으로 녹여 쇳물 같은 유리물을 만듭니다.
  2. 이 유리물을 얕고 넓은 욕조(Bath)처럼 생긴, 녹은 주석이 찰랑거리는 수조 위로 흘려보냅니다.
  3.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유리물은 주석 용액 위로 넓게 퍼지며 중력에 의해 완벽한 수평과 균일한 두께를 갖추게 됩니다.
  4. 이 상태로 서서히 냉각시키며 롤러로 끌어내면, 전혀 깎거나 다듬을 필요 없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판유리가 탄생합니다.

필킹턴은 이 아이디어를 상용화하기 위해 무려 7년의 시간과 70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수천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를 쏟아부었습니다. 실패가 거듭되며 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마침내 1959년, 완벽한 플로트 유리를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이 발명으로 유리의 생산 단가는 극적으로 낮아졌고, 품질은 과거 황실에서나 쓰던 최고급 연마 유리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철근 콘크리트와 에어컨, 그리고 '유리 피부'의 만남

필킹턴의 플로트 유리 발명은 건축계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다루었던 철근 콘크리트와 결합하면서 현대 마천루의 상징인 '커튼월(Curtain Wall)' 공법이 만개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의 건물은 벽돌이나 돌로 두꺼운 벽을 쌓아 지붕의 무게를 버티는 '내력벽' 구조였습니다. 창문을 크게 내면 건물이 무너지기 때문에 창문은 늘 작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철근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가 건물의 뼈대 역할을 대신하면서, 외벽은 더 이상 무거운 하중을 견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건축가들은 이 가벼워진 외벽에 무거운 콘크리트 대신, 가볍고 세련되며 채광이 뛰어난 대형 판유리를 '커튼처럼' 매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커튼월 공법입니다. 플로트 공법 덕분에 저렴해진 고품질의 대형 판유리가 쏟아져 나오자, 전 세계의 도시는 경쟁적으로 통유리 빌딩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부동산 인사이트] 통유리 빌딩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점령한 이유

오늘날 프라임 오피스 빌딩이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약속이나 한 듯 통유리 외관을 채택하는 데는 미학적 이유뿐만 아니라 철저한 부동산 경제학이 숨어 있습니다.

구분통유리(커튼월) 빌딩의 장점
공사 기간 단축공장에서 미리 프레임과 유리를 조립해 현장에서 끼워 넣기만 하므로, 콘크리트 외벽을 양생하는 것보다 공기가 획기적으로 짧습니다. 공기 단축은 곧 금융 비용(이자) 절감으로 이어집니다.
건물 경량화유리와 알루미늄 프레임은 콘크리트나 석재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건물 전체의 하중이 줄어들면 기초 공사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고, 더 높이 지을 수 있습니다.
임대료 프리미엄탁 트인 파노라마 조망권은 임차인이나 매수자에게 강력한 소구 포인트가 됩니다. '뷰(View)가 곧 돈'인 현대 부동산 시장에서 통유리는 임대료와 매매가를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공간 활용 극대화외벽의 두께가 얇아지기 때문에, 같은 대지 면적이라도 실사용 면적(전용면적)을 미세하게나마 더 넓게 뽑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통유리 빌딩은 태양열을 그대로 흡수해 거대한 '온실'이 되어버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225편에서 살펴보았듯, 윌리스 캐리어의 '에어컨'이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에어컨이 없었다면 플로트 유리가 아무리 저렴하게 생산되었더라도 오늘날의 통유리 마천루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단순한 투명함을 넘어, 현대 건축의 필수품으로

설거지통에서 시작된 알라스테어 필킹턴의 영감은 오늘날 전 세계 판유리 생산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표준 기술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바라보는 아파트 거실 창문, 출퇴근길에 타는 자동차의 앞유리,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의 매끄러운 액정 유리까지, 플로트 공법의 혜택을 받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최근의 판유리는 단순한 투명함을 넘어 진화하고 있습니다. 유리 표면에 은(Silver)을 코팅해 가시광선은 투과시키고 적외선(열)은 반사하는 로이(Low-E) 유리는 통유리 빌딩의 에너지 효율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또한, 전기를 가하면 투명해졌다가 불투명해지는 스마트 유리, 태양광을 발전시키는 유리 등 유리는 지금도 건축의 미래를 바꾸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건물을 수직으로 끌어올리고, 철근 콘크리트가 뼈대를 세우며, 에어컨이 숨을 불어넣고, 플로트 유리가 매끄러운 피부를 입혀 완성된 현대의 마천루. 그런데 이 거대한 건물 내부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건물이 거대해지고 층당 면적이 넓어지면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 채광만으로는 건물 안쪽 깊숙한 곳까지 빛이 닿지 않아 대낮에도 암흑천지였던 것입니다. 창가 자리가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음 227편에서는 거대한 빌딩의 깊은 속내를 대낮처럼 밝혀주며 24시간 잠들지 않는 도시를 만든 '인공조명과 형광등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