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 72일, 시민의 도시 실험
정부가 도시를 버린 순간, 시민들은 스스로 도시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에서 시작된 파리 코뮌은 불과 72일 동안 존속했지만, 노동자 자치와 지방분권, 여성의 정치 참여를 둘러싼 현대 정치의 질문을 오늘까지 남겼습니다.
앞선 편에서는 로버트 고더드의 액체연료 로켓이 인간의 시선을 지상에서 우주로 확장한 순간을 살펴봤습니다. 이어 성 패트릭의 날에서는 종교적 전통이 이민자 공동체와 민족 정체성의 상징으로 바뀌는 과정을 확인했지요. 이번에는 시선을 다시 유럽의 한 도시로 돌려보겠습니다. 전쟁에 패배하고, 정부에 버림받았다고 느낀 파리 시민들이 직접 권력을 쥐었던 역사적 실험입니다.
파리 코뮌의 출발점: 패전 뒤의 파리
파리 코뮌을 이해하려면 1870년부터 시작된 보불전쟁, 즉 프로이센이 주도한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빠른 승리를 기대했지만, 프랑스군은 예상보다 훨씬 무력했습니다. 1870년 9월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자 제정은 무너졌고, 파리에서는 공화정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공화정이 곧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포위했고, 시민들은 약 4개월 동안 식량과 연료 부족을 견뎌야 했습니다. 말과 개, 심지어 동물원의 코끼리까지 식량으로 소비되었다는 기록은 당시 포위 생활이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1871년 1월 휴전이 체결될 무렵 파리 시민들에게 남은 것은 굶주림, 패전의 굴욕, 그리고 중앙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이었습니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 더 선명해졌습니다. 새로 구성된 정부를 이끈 아돌프 티에르는 파리의 급진적 시민과 국민방위대가 가진 무기를 회수하려 했습니다. 특히 파리 북부의 몽마르트르와 벨빌 언덕에는 국민방위대가 자금을 모아 구입한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정부는 이 대포들을 가져가려 했고, 시민들은 이를 무장해제이자 배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871년 3월 18일 새벽, 정부군이 몽마르트르의 대포를 옮기려 하자 주민들과 국민방위대가 몰려들었습니다. 병사 일부는 명령을 거부했고, 장군 클로드 르콩트와 토마는 체포된 뒤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무기 탈취 작전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파리의 시민 권력과 베르사유에 자리 잡은 중앙정부가 정면으로 충돌한 순간이었습니다.
파리 코뮌은 하루아침에 탄생한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전쟁, 식량난, 계급 갈등,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이 한꺼번에 폭발한 결과였습니다.
파리 코뮌은 무엇을 바꾸려 했나
3월 18일 정부군이 파리에서 철수하자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가 도시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3월 26일 선거가 실시되었고, 3월 28일 파리 코뮌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코뮌’은 프랑스어로 지방자치단체를 뜻하지만, 당시에는 단순한 시청 조직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파리 시민이 자신들의 대표를 뽑고, 그 대표를 통제하는 자치 공화국에 가까웠습니다.
코뮌의 대표들은 현대의 국회의원처럼 임기가 보장된 특권 계층이 아니었습니다. 대표는 시민에 의해 언제든 소환될 수 있었고, 공무원의 보수도 일반 노동자의 임금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하자는 원칙이 제시되었습니다. 정치가 전문 직업인이 되어 시민과 분리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코뮌이 시도한 정책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 임대료 부담 완화: 포위 기간 동안 쌓인 주거 임대료를 유예하거나 면제했습니다.
- 노동자의 생계 보호: 빵집 노동자의 야간 노동을 금지하고, 전당포에 맡긴 생활필수품을 되찾을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 버려진 작업장의 운영: 소유주가 떠난 공장을 노동자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했습니다.
- 정교 분리와 교육 개혁: 교회의 영향력을 줄이고, 무상·세속 교육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 지방자치 확대: 파리뿐 아니라 프랑스의 각 코뮌이 더 많은 자치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정책들이 모두 충분히 실행된 것은 아닙니다.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행정 체계는 불안정했고, 코뮌 내부에서도 급진적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자코뱅 전통을 계승한 정치인들이 자주 충돌했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정치적 자유를 선거일에만 맡기지 않고 일상생활의 권리와 연결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집세, 교육, 노동시간, 공장 운영이 모두 정치의 문제로 다뤄졌습니다.
여성들은 거리에서 역사를 움직였다
파리 코뮌을 이야기할 때 자주 빠지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여성들입니다. 당시 프랑스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었고 공식적인 대표로 선출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코뮌의 탄생과 방어, 사회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3월 18일 몽마르트르에서 정부군과 주민들이 대치했을 때, 많은 여성들이 먼저 현장에 나가 병사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호소했습니다. 루이즈 미셸은 교사이자 혁명가로 활동하며 국민방위대에 참여했고, 체포 이후 재판에서도 코뮌을 공개적으로 옹호했습니다. 그는 사형을 요구받은 자리에서 “나를 살려두면 복수를 멈추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까지도 루이즈 미셸은 여성 혁명가이자 아나키즘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엘리자베트 드미트리에프와 나탈리 르 멜이 조직한 ‘여성동맹’은 여성 노동자들을 모아 병원 운영, 물자 조달, 군수품 생산, 방어선 지원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남성 혁명가를 돕는 보조 인력이 아니었습니다. 여성의 노동권과 교육권, 동일노동 동일임금, 혼외 출생 아동의 권리를 요구하며 독자적인 정치 의제를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모순이 드러납니다. 파리 코뮌은 여성의 정치적 참여를 현실에서 확대했지만, 법적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는 못했습니다. 혁명적 공간에서도 성별의 장벽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이 거리와 노동 현장, 병원과 조직에서 직접 활동한 경험은 이후 유럽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여성 참여 논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72일 만에 끝난 이유: 베르사유군과 피의 일주일
코뮌이 도시를 운영하는 동안 베르사유의 티에르 정부는 군대를 재편했습니다. 독일군에 붙잡혔던 프랑스 포로들이 석방되어 정부군에 편입되었고, 베르사유군은 파리를 탈환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코뮌은 군사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고, 내부 의사결정도 느렸습니다. 파리 밖의 지방 도시들이 연쇄적으로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도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1871년 5월 21일 정부군이 파리 서쪽 방어선을 뚫으면서 ‘피의 일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시가전이 벌어졌고, 코뮌 지지자들은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조직된 정규군을 상대로 장기간 버티기는 어려웠습니다. 코뮌 측 일부는 공공건물과 상징물을 불태웠고, 튀일리궁과 시청 등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전쟁과 혁명의 공포가 한꺼번에 도시를 집어삼킨 것입니다.
진압 이후의 희생 규모는 자료와 계산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코뮌 가담자와 민간인을 포함해 수천 명에서 2만 명 이상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만 명이 체포되었고, 많은 이들이 뉴칼레도니아 등지로 유배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코뮌을 국가를 파괴한 폭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했고, 코뮌 지지자들은 이를 노동자와 시민을 학살한 반혁명으로 기억했습니다.
이처럼 파리 코뮌은 단지 ‘혁명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로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이후의 정치적 상상력을 크게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파리 코뮌이 현대에 남긴 유산
카를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의 붕괴 직후 발표한 『프랑스 내전』에서 코뮌을 노동자 계급이 국가권력을 새롭게 조직한 사례로 해석했습니다. 이후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게 코뮌은 중요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반면 아나키스트들은 중앙집권적 국가를 대신해 지역 공동체와 자치 조직이 사회를 운영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코뮌의 의미를 특정 이념 하나로만 가두면 오히려 역사적 특징을 놓치게 됩니다. 코뮌에는 노동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상공인, 급진 공화주의자, 국민방위대원, 외국인 혁명가도 참여했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레오 프랑켈처럼 외국인도 지도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는 파리 코뮌이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 운동이 아니라 국제적 연대와 도시 시민권을 둘러싼 실험이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파리 코뮌의 질문은 낯설지 않습니다. 도시의 중요한 결정을 중앙정부가 독점해야 할까요? 주민이 선출한 대표를 임기 중에 소환할 수 있어야 할까요? 공공서비스와 주거권은 시장에만 맡겨도 될까요? 재난과 전쟁 속에서 시민의 안전을 누가 책임져야 할까요?
물론 코뮌의 모든 정책을 그대로 현대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에는 보통선거의 범위가 제한적이었고, 무장정치와 폭력의 문제도 컸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단순히 선거 절차만을 뜻하는지, 아니면 시민이 자신의 일상과 도시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것까지 포함하는지 묻는 데에는 여전히 유효한 사례입니다.
파리 코뮌의 가장 큰 유산은 72일간의 통치 성과만이 아닙니다. 시민이 도시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역사 한가운데 던졌다는 데 있습니다.
1871년 3월 18일의 파리는 전쟁에 패배한 도시였고, 동시에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실험한 도시였습니다. 고더드의 로켓이 짧은 비행으로 우주개발의 출발점을 만들었다면, 파리 코뮌은 짧은 존속 기간으로 시민 자치와 사회적 권리의 거대한 논쟁을 열었습니다. 성 패트릭의 날이 상징의 재창조를 보여줬다면, 파리 코뮌은 도시 자체가 정치적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입니다.
오늘의 역사 체크리스트
- 1871년 3월 18일, 정부군의 대포 회수 시도가 파리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 3월 26일 선거 뒤 3월 28일 파리 코뮌이 공식 선포되었습니다.
- 임대료 완화, 노동자 협동조합, 세속 교육, 정교 분리 등이 주요 정책으로 추진되었습니다.
-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지만 조직과 전투, 사회정책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 5월 21일부터 28일까지의 ‘피의 일주일’ 진압으로 코뮌은 무너졌습니다.
- 이 사건은 지방자치, 노동권, 여성의 정치 참여를 둘러싼 현대적 논쟁에 계속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